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메레르급 전열함 (문단 편집) === HMS 임플라커블(뒤게 트루앙, HMS 푸드로얀트)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Royal_Navy_during_the_Second_World_War_A19880.jpg|width=100%]]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트라팔가 해전]] 기념식 당시의 모습. 오른쪽이 임플라커블이며 왼쪽의 함선은 레다급 프리깃 HMS 트링코말리로 보여지나 확실하진 않다. 사진에서 임플라커블은 '''"영국은 제군이 각자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넬슨 제독의 개전 신호를 깃발로 표현하고 있다. || 본래 함명은 뒤게 트루앙(Duguay-Trouin). 프랑스 로슈포르에서 1800년에 취역했다. 1802년 첫 임무로 [[아이티]] 혁명 진압을 명받아 동형함 두케인 및 38문 프리깃 게리에르[* 영국에 노획된 이후 [[미영전쟁]] 당시 미국 중프리깃 [[컨스티튜션|USS 컨스티튜션]] 함과의 단함 전투에서 아작난 것으로 유명한 함선.] 와 함께 수송선단으로 위장하여 생 도밍그로 파견되었으나 애로건트급 74문 3급 전열함 HMS 벨레로폰[* 당시 영국군의 최고 수훈함 중 하나.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는 캐나다급 74문 3급 전열함 HMS 마제스틱과 함께 프랑스 해군 브뤼예 제독의 기함이었던 [[오세앙급 전열함|오세앙급 118문 1급 전열함]] 오리앙 함 및 토낭급 80문함 토낭에 달려들어 혈투를 벌였다. 결국 체급 차이로 인해 무력화되어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오리앙을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고, 곧이어 몰려온 다른 영국 함선들의 공격으로 인해 오리앙은 화재가 일어나 폭침하고 토낭은 나포되었다. 한편 [[트라팔가르 해전|트라팔가]]에서는 스페인 해군의 몬타니에급 80문 전열함 모나르카 함의 선미에 종사를 두 방 먹여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곤 프랑스 해군의 테메레르급 에이글레 함, 노획된 엘리자베스급 74문함 스위프트슈어 및 스페인 해군의 74문함들인 산 후안 네포무세모함과 바하마 '''네 척과'''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특히 에이글레함과의 혈전은 [[르두터블]]과 [[HMS 테메레르|테메레르]], [[HMS 빅토리|빅토리]]의 싸움 못지않게 참혹하여, 서로 함체를 묶어버리곤 상갑판에서 도선을 시도하며 총질을 해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아래의 포갑판들에서도''' 양 함체가 붙어버리자 대포를 뒤로 아예 밀어버린 뒤 포문으로 도선을 시도하거나 상대 포문 안에 총을 갈겨대고 수류탄을 집어던져대기까지 했으며, 이 때문에 벨레로폰의 탄약고가 한번 유폭할 뻔 하기도 했다. 이 처절한 전투가 끝났을 때 벨레로폰의 사상자는 사망자 27명과 부상자 123명, 총 정원의 35%에 달했는데 그 중에는 저격당해 사망한 쿡 함장도 있었다. 그럼에도 벨레로폰은 승리했고, 모나르카와 바하마 두 척을 나포한 공적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영국으로 망명을 시도할 때 그의 항복을 받아내며 그 영광의 절정을 찍었다. 그러나 벨레로폰은 그를 플리머스 항에서 내려주지 않고, 대신 영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아메리카급 전열함 HMS 노섬벌랜드에 옮겨 태워 [[세인트 헬레나]]로 보내버렸다. 노후화가 심해 그런 정치적 거물을 대양을 건너 실어나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함선이니만큼 임플라커블과도 여러 번 만났는데, 첫 만남은 아이티 혁명 당시이며 트라팔가에서도 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몇 년 후에 러시아-영국 전쟁 당시에는 협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HMS 엘레판트, HMS 뱅가드 및 컬로덴급 74문 3급함 HMS 테세우스의 봉쇄로 고립되었다. 이때 게리에르와 뒤게 트루앙은 탈출했으나, 두케인은 영국에 나포되었다가 1804년 자메이카 앞바다에 좌초되었고 이듬해에 해체되었다. || [[파일:1280px-Vsevolod_v._Implacable_1808.jpeg.jpg|width=100%]] ----- [[러시아 해군|러시아 제국 해군]] 전열함 세보르드를 굉침시킨 임플라커블과 센타우르 || [[트라팔가 해전]]에서는 프랑스 함대의 전위에 배치되어 있었고, 덕분에 후미에서 벌어진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다른 세 척의 동료 함선들과 함께 살아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쫓아온 영국 전열함 HMS 시저[* 80문 3급 전열함.], HMS 나무르[* 1745년 건함계획에 따라 건조된 90문 2급 전열함. 그러나 트라팔가 직전에는 개조되어 74문급으로 축소되었다.], HMS 히어로[* 페임급 74문 3급 전열함.]와 HMS 커레이저스[* 74문 3급 전열함. 영국의 함선설계자 존 헨슬로우가 설계했다. 연장형 74문함으로 특별히 건조되었으며, 상갑판의 18파운더를 모조리 24파운더로 교체하여 화력 또한 동급에 비해 강력했다.]외 수척의 프리깃과의 전투 끝에 나포되어 영국 해군 소속의 HMS 임플라커블 호로 개칭되었다. 1808년에는 발트 해에서 스웨덴 해군 전열함대와 연합하여 [[러시아 해군|러시아 제국 해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마르스급 74문 전열함 HMS 센타우르 함과 합세해서 [[러시아 제국]]의 야로슬라블급 74문 전열함 브세보로드 함[* 세보르드 함이라고도 불린다.]를 공격하여 탄약고 유폭으로 침몰시켰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항인 [[크론슈타트]]를 봉쇄했다. 이후 나르바 만에서는 러시아 차르의 소유물을 나르던 수송선단을 덮쳤으며, 한때 적이었던 HMS 벨레로폰, HMS 멜포메네, HMS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러시아 포함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운반하던 군용 화약들을 날려버렸다. 이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로 보내져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를 구해내려 했으나 그가 영국의 구원을 거절하여 실패했다. 대신 [[니콜라 장드듀 술트]]와 클로드 빅토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받는 [[카디즈]] 항으로 가서 리처드 키츠 제독이 이끄는 영국-스페인 연합함대의 기함으로써 지역을 방어해냈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군자금을 싣고 왔으며, 1813년 [[플리머스]] 항으로 돌아갔다. ||[youtube(px-4xtzwXl0)]|| || 1930년, 예인선에 이끌려 한때 적이었던 [[HMS 빅토리]]와 124년만에 재회하는 임플라커블. || 전후인 1840년에는 영국 지중해 함대 소속으로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의 군대가 점령한 [[오스만 제국]]령 시리아로 보내져 무력 시위를 벌이고 [[오스트리아 제국군]], [[오스만 제국군]] 함대와 함께 [[아크레]]의 이집트군을 포격했다.[* 이때 이집트 해안포대는 너무 고각으로 발사하여 명중탄을 거의 내지 못한 반면, 영국 해군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거의 일방적으로 아크레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막바지에는 아크레의 탄약고가 유폭하여 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영국 수병들이 포츠머스 해안에 새로 건설된 해군 포격 연습장인 HMS 엑설런트에서 훌륭한 포격 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44년 예비역으로 분류되었고, 1855년 훈련함으로 전환되어 남은 백 년의 세월을 보냈다. 세계대전 중에도 연습함으로 사용되었는데 1943년에는 푸드로얀트라는 새 이름을 받기도 했다. 지지리도 운이 없어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아 침몰했던''' 블랙프린스급 74문 3급 전열함 HMS 웰즐리 함[* [[폭격|항공 폭격]]으로 침몰한 유일한 전열함으로 기록되어 있다.][* 블랙프린스급은 영국이 노획한 [[덴마크 해군]]의 74문 전열함 크리스티앙 7세함의 구조를 바탕으로 축소설계한 함급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의 봄베이 조선소에서 총 4척이 극비로 건조되었다. 웰즐리는 '''일단 서류상으로는''' 이 함급의 1번함이다. 그러나 함급명이 웰즐리급이 아니라 블랙프린스급인 데에는 사정이 좀 있는데, 다름 아닌 미국의 중프리깃 '''[[컨스티튜션|USS 컨스티튜션 함]]''' 때문이다. 컨스티튜션은 [[미영전쟁]] 와중인 1812년 12월 29일에 영국 해군의 팔라급 38문 프리깃 HMS 자바 함을 나포한 후 태워버린 적이 있다. 고작 프리깃 한 척이었지만 문제는 자바 함이 다른 함선들에 보내질 승무원들과 함장들, 뱅거급 전열함 콘월리스 함의 함저에 설치할 구리판, 그리고 웰즐리 함의 설계도를 운반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영국 해군의 금쪽같은 전열함 두 척의 건조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다. 콘월리스 함은 함체는 이미 완공된 상태로 수 개월이나 구리판을 기다려야 했고, 극비로 취급되어 건조되던 웰즐리 함은 급한대로 콘월리스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아예 재설계해야 했다. 이 때문에 웰즐리 함은 서류상으로는 블랙프린스급 전열함으로 분류되지만 사실상 뱅거급 전열함의 41번째 함선으로 취급되며, 웰즐리급으로 명명되었어야 할 함급명 자체도 2번함인 블랙프린스에게 빼앗긴 것이다. 후에는 콘월리스와 함께 [[아편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과는 달리, 임플라커블은 별다른 위협을 받지 않고 종전을 맞았다. 그러나 전후 영국이 이 배를 유지할 돈이 없는 관계로 1949년에 [[채널 제도]] 올더니 섬[* 이는 매우 상징적인 위치 선정이다. 채널 제도는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다 영국 왕실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국]] 공작 가문이던 시절 프랑스 땅에 보유했던 영토의 마지막 남은 잔해이기 때문. 따라서 채널 제도는 구 [[프랑스 왕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이기도 하다. 프랑스와 영국 두 국가의 해군 함선으로 임무를 수행한 임플라커블의 무덤으로 이만큼 적절한 곳은 없을 것이다.] 앞바다에 자침[* 선체 하부를 폭파시켰다. 근현대적 철제 군함이 아닌 목제 군함이라서 밸브를 열어 물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처분되었다. 영국 해군 내에서 빅토리에 이어 가장 오래된 함선이자, 1920년대에 모금 운동까지 해서 살린 배란 점에서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다. 사실 전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돈이 없어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 전함 [[HMS 워스파이트]] 등의 2차대전의 역전의 용사들도 해체하는 마당에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자침시키기는 아무래도 좀 아까워서 원래 주인이었던 프랑스에 반환하려고 했으나 프랑스는 대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게 전 국토가 점령당했었던 만큼 영국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아 반환을 거절했다. 침몰할 때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를 같이 달았다. 이때 일화가 좀 있다. 폭파할 때 적정량보다 많은 폭약을 쓴 바람에, 깃발이 꽂힌 상갑판이 침몰하기 싫다는 듯이 함체에서 분리되어 오래도록 파도를 맞으며 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몰하고 나서 며칠 후에는 그 남은 잔해 중 일부가 프랑스의 해변으로 떠올라왔다고. 임플라커블의 침몰 이후에야 오래된 함선들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본격적으로 폭발했고, 이는 영국이 1869년에 건조된 [[클리퍼]] [[커티 삭]] 호를 보존하기로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youtube(qtT6gUc17uQ)]|| || 자침 직전 선수상과 주요 설비를 철거하는 모습. 내부의 모습 또한 찍혀 있다. || ||[youtube(xTl7tphyvJY)]|| || 임플라커블의 침몰 영상 || 임플라커블의 유산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개가 남아 있다. 우선 영국 그리니치에 있는 영국 해군 박물관[* 세계 표준시로 유명한 [[그리니치 천문대]] 바로 아래, 길을 사이에 두고 구 영국 해군대학과 마주보고 있다. 위에 언급된 [[커티 삭]] 호도 이 근처에 정박해 있다.]에는 임플라커블의 함미 부분과 선수상이 전시되어 있다. 둘 다 진품이다. 함미에는 영국 해군기와 프랑스 삼색기가 모두 꽂혀 있다. 그 외 [[캡스턴]]은 임플라커블이 건조된 장소인 프랑스 로슈포르의 해군 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선장실 문은 스코틀랜드 던디에 박물관함으로 개조되어 정박 중인 레다급 38문 프리깃[* 영국의 프리깃 함급. 사네가 설계한 에베급 38문 프리깃 에베 함을 노획한 뒤 복제한 함급이다. 총 47척이 건조되었다. 속도는 13노트로 매우 빨랐지만 장점은 그뿐이었고, 기존의 영국제 성공작인 라이블리급 38문 프리깃보다 여러 모로 퇴보한 모습을 보여줬다. 우선 항해성이 나빠 옆질이 심했던데다 바람을 거슬러오르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적재량도 그닥 크지 않았기에 작전 기간 동안 필요한 충분한 양의 청수를 담을 수도 없었다. 청수 문제는 미생물 오염으로부터 그나마 안전한 철제 식수탱크가 보급된 이후에야 그나마 나아졌다. 때문에 이 함급을 모는 영국 함장들은 자신들의 배가 항상 흔들리면서 파도를 뒤집어쓴다고 '젖어있는 배'라고 까대거나 상부에 용골 부분을 손 좀 보라고 항의하곤 했다.] HMS 유니콘 함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유니콘 함 또한 1824년에 건조된 매우 오래된 함선이다. 다만 원형을 그리 잘 유지한 편은 아니므로, 제대로 된 레다급 프리깃을 보고 싶으면 스코틀랜드 하트풀에 보존 중인 동급함 트링코말리 함[* 1817년에 인도 봄베이(현 [[뭄바이]])에서 건조되었다. 굳이 뭄바이에서 건조된 이유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숲들이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건조 주체는 '''인도 업체인''' 와이다(Waida) 사였다.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 출신의 노지 누스루완지 와이다를 창업주로 하는 이 회사는 1736년부터 봄베이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함선을 납품하며 성장했고, 1750년에는 아시아의 첫번째 드라이 독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 봄베이 조선소는 영국 식민제국의 주요 조선소 중 하나로서 [[미영전쟁]] 당시 프랜시스 스콧 키가 포로로 잡혀 있다가 미국의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한 HMS 민덴 함, [[아편 전쟁]] 당시 [[난징 조약]]이 체결된 HMS 콘월리스 함이나 위에 이미 언급된 웰즐리 함 등의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했다. 그리고 와이다 가문이 제작한 선박의 진수식에서는 설계자가 은제 못 하나를 함선의 용골에 직접 박아 넣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는 배의 행운을 기원하는 파르시 조로아스터교들의 의식이었다. 그 외에도 와이다 가문은 봄베이를 다양한 면에서 유럽적으로 재개발하여 봄베이를 영국 식민제국의 아시아 지역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성장시킨 숨은 주역이라고 평가된다. 현재는 산하에 식품가공업체나 직물 산업, [[저가 항공사]] 등의 여러 회사들을 거느린 거대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당시 건설된 뭄바이 조선소의 드라이 독 또한 일부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을 보러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 함선 또한 임플라커블과 연관이 좀 있는 함선이기도 하다. 1930년대 임플라커블과 트링코말리 두 함선은 공동으로 보존 결정이 내려져 연습함, 수용함, 석탄창고로 사용되었고, 영국 해군의 역사 그 자체로서 국가적 행사에 불려다녔다. 그리고 임플라커블이 1943년에 받은 푸드로얀트라는 이름 또한 트링코말리와 공동으로 받은 것이다. 다만 트링코말리는 현역에서 물러나고 6년 후인 1992년에 원래 함명으로 다시 개칭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